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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 Dec, 2025
최악의 시나리오부터 생각하는 버릇, 언제부터 생겼을까
최악의 시나리오부터 생각하는 버릇, 언제부터 생겼을까 오늘도 최악부터 아침 회의. 신규 마케팅 캠페인 안건. 팀원이 발표한다. "이번 캠페인으로 유저 10만 확보 예상됩니다." 내 머릿속. "10만? 만약 1만도 안 오면? 예산 5000만원 날리면? 다음 시리즈B 투자 어떻게 받지? 런웨이는 8개월인데?" 입 밖으로. "좋은데, 최악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 거지?" 팀원들 표정이 굳는다. 또 시작이다.이게 매번이다. 신규 기능 개발. "개발 실패하면?" HR 채용. "3개월 만에 퇴사하면?" 제휴 제안. "상대가 배신하면?" 최악부터 생각한다. 항상. 팀원들은 내가 부정적이라고 느낄 거다. 아닌데. 그냥 조심스러운 거다. 신중한 거다. 그런데 요즘 의문이 든다. 이게 정말 신중함일까. 아니면 그냥 겁일까. 2012년, 첫 번째 망함 소셜커머스 창업. 27살. 그때는 최악의 시나리오 따위 없었다. "될 거야. 안 되면 또 하면 되지." 투자 받았다. 5억. 사무실 얻었다. 강남. 직원 뽑았다. 20명. 6개월 만에 월 매출 3억. 신났다. "1년 안에 100억 간다." 더 투자받았다. 15억 추가. 사무실 넓혔다. 직원 40명. 그리고 망했다. 경쟁사들 가격 전쟁. 마진 마이너스. 재구매율 10%. 고객센터에 환불 요청만 쌓였다. 투자금 다 썼다. 급여 못 줬다. 직원들 나갔다. 사무실 뺐다. 3년 만에 폐업.그때 배웠다. "될 거야"는 근거가 아니라는 걸. 변한 건 그때부터 두 번째 창업. 2017년. 32살. 이번엔 달랐다. 모든 결정에 "만약 안 되면?"을 붙였다. 직원 채용. "이 사람이 3개월 안에 그만두면 우리 번아웃은?" 마케팅 예산. "이 금액 날리면 런웨이는?" 제휴 계약. "상대가 조건 안 지키면?" CFO가 말했다. "대표님, 너무 보수적이신 거 아닙니까?" 그래서 뭐. 조심하는 게 죄야?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좋은 기회가 왔다. 대형 유통사 제휴. "우리 앱을 전국 500개 매장에 깔겠다." 조건이 있었다. 3개월 안에 기능 10개 추가 개발. 투자 필요. 10억. 나는 거절했다. "만약 개발 못 끝내면? 만약 유통사가 계약 파기하면? 10억 날리면 우리 죽는다." CFO가 말했다. "이 기회 놓치면 우리도 죽습니다." 나는 안 했다. 3개월 후. 경쟁사가 그 자리 차지했다. 6개월 후 그 경쟁사 시리즈B 200억 투자 받았다. 우리는 그대로였다. 코로나, 그리고 두 번째 망함 2020년. O2O 서비스. 오프라인 기반. 코로나 터졌다. 매출 90% 증발. 그때도 최악의 시나리오는 생각했었다. "경기 침체 오면?" "경쟁 심해지면?" 근데 팬데믹은 생각 못 했다. 이건 최악을 넘어선 재앙이었다. 6개월 버텼다. 직원 절반 정리해고. 급여 반토막. 사무실 축소. 투자자들 만났다. "브릿지 투자 부탁드립니다." 거절당했다. "이 업종은 당분간 어렵습니다." 버틸 수 없었다. 폐업.두 번 망했다. 37살. 이혼했다. 아내가 말했다. "당신이랑은 못 살겠어요. 당신 사업보다 제가 소중한 적이 없었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세 번째, 그리고 지금 2022년. 세 번째 창업. 헬스케어 앱. 이번엔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42살에 또 망하면 재기 불가능. 그래서 더 조심스러워졌다. 모든 결정에 최악의 시나리오부터 짰다. 개발 일정. "2주 지연되면?" 마케팅 채널. "CAC가 예상의 2배면?" 직원 증원. "매출 성장 안 되면?" CTO가 말했다. "대표님, 우리 너무 느린 거 아닙니까? 경쟁사들은 벌써 시리즈B인데." 나는 답했다. "천천히 가도 망하지만 않으면 돼." 근데 맞는 말일까. 우리 월 매출 1.5억. 2년 걸렸다. 경쟁사는 6개월 만에 3억 찍었다. 우리 직원 10명. 경쟁사는 50명. 우리 시리즈A 30억. 경쟁사는 시리즈B 150억. 그래도 우리는 아직 살아있다. 흑자 전환 목전이다. 경쟁사 3개 중 2개는 벌써 망했다. 과도한 투자, 빠른 성장, 지속 불가능한 구조. 오늘 오후, 또 회의 투자사에서 연락 왔다. "추가 투자 30억 가능합니다. 대신 6개월 안에 매출 5배 성장 필요합니다." 팀원들 눈빛이 반짝인다. 기회다. 나는 묻는다. "만약 5배 성장 못 하면?" 투자사 담당자. "그럼 다음 라운드는 없습니다." 최악의 시나리오. 30억 받는다. 직원 30명으로 증원. 마케팅에 20억 쓴다. 매출 3배밖에 안 오른다. 다음 투자 못 받는다. 런웨이 6개월. 급여 못 준다. 또 망한다. "검토해보겠습니다." 답했다. 회의 끝나고 CTO가 말한다. "대표님, 이거 놓치면 안 됩니다." CFO가 말한다. "리스크는 있지만 기회입니다." 나는 안다. 내가 너무 조심스럽다는 걸. 버릇일까, 트라우마일까 퇴근길. 차 안. 생각했다. 내가 최악의 시나리오부터 생각하는 버릇. 이게 언제부터였나. 정확히는 2012년 폐업 후부터다. 첫 번째 망한 후. 그 전엔 안 그랬다. "될 거야"였다. 근거 없는 낙관. 망하고 나서 배웠다. 될 것 같아도 안 되는 게 사업이다. 준비 안 하면 죽는다. 그래서 최악부터 준비했다. 근데 이게 신중함일까. 아니면 그냥 겁일까. 신중함이라면. 리스크를 줄이는 합리적 접근. 지속 가능한 성장. 망하지 않는 전략. 겁이라면. 과거의 트라우마. 또 실패할까 봐. 또 직원들한테 미안할까 봐. 또 가족 잃을까 봐. 솔직히 모르겠다. 구분이 안 된다. 신중함과 겁의 경계. 합리적 판단과 트라우마의 경계. 아내의 한마디 집에 왔다. 10시. 아내가 저녁 차렸다. "회의 어땠어?" "투자 제안 받았어. 30억. 근데 조건이 빡세." "받을 거야?" "모르겠어.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면..." 아내가 끊는다. "당신 그거 알아?" "뭐?" "당신, 최악의 시나리오 생각하느라 최선의 시나리오는 생각 안 해." 뜨끔했다. "만약 잘 되면? 만약 5배 아니라 10배 성장하면? 만약 이게 마지막 기회면?" 말문이 막혔다. "당신이 조심스러운 건 이해해. 두 번 망했으니까. 근데 그게 다음 성공을 막으면 안 되잖아." 맞는 말이다. 나는 항상 망할 경우만 생각했다. 잘 될 경우는 생각 안 했다. 왜냐하면. 잘 될 거라고 믿었다가 망했으니까. 두 번이나. 그게 트라우마다. 밤 11시, 혼자 아내 자고. 나 혼자 거실. 노트북 켰다. 엑셀 시트. 최악의 시나리오 계산. 30억 받는다. 직원 30명. 마케팅 20억. 매출 3배. 다음 투자 실패. 런웨이 6개월. 망한다. 계산 끝났다. 그리고 새 시트를 켰다. 처음으로. "최선의 시나리오". 30억 받는다. 직원 30명. 마케팅 20억. 매출 7배. 다음 투자 200억. 시리즈C. 엑싯 가능성. 숫자를 보니 기분이 이상하다. 가슴이 뛴다. 근데 동시에 무섭다. 이 설렘을 믿어도 될까. 2012년에도 이랬다. 2017년에도 이랬다. 그리고 망했다. 근데 안 믿으면. 영원히 작은 회사로 남는다. 안전하게. 조금씩. 그리고 기회는 다 놓친다. 내일 아침 투자사한테 답해야 한다. 아직 결정 못 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완벽하게 준비했다. 엑싯 플랜. 직원 정리해고 순서. 사무실 축소 계획. 개인 파산 시나리오까지. 근데 최선의 시나리오는. 막상 써놓고 보니 낯설다. 오랜만이다. 이런 상상. 신중함일까, 겁일까. 여전히 모르겠다. 근데 아내 말이 맞는 것 같다. 최악만 생각하면 최선은 절대 안 온다. 어쩌면 이게 답일지도. 최악을 준비하되, 최선을 믿는 것. 망할 수도 있다. 세 번째로. 근데 안 망할 수도 있다. 처음으로. 새벽 2시 아직도 못 잤다. 엑셀 시트 두 개를 번갈아 본다. 최악. 최선. 최악. 최선. 42살. 세 번째 창업. 두 번 망한 놈. 최악의 시나리오부터 생각하는 버릇. 2012년부터 10년째. 이게 날 지켜줬다. 이번 회사가 2년 동안 안 망한 이유. 근데 이게 날 가두기도 했다. 더 큰 기회를 놓친 이유. 내일 아침. 투자사한테 전화한다. 뭐라고 답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근데 한 가지는 안다. 신중함이든 겁이든. 이 버릇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이 버릇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음이 결정된다.최악을 준비하는 건 맞다. 근데 최선도 믿어야 한다. 그게 창업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