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혼 3년차 아내와 '창업 얘기'를 안 하기로 한 날

재혼 3년차 아내와 '창업 얘기'를 안 하기로 한 날

재혼 3년차 아내와 ‘창업 얘기’를 안 하기로 한 날

저녁 7시 30분, 퇴근

회사 나왔다. 7시 반. 팀장이 “대표님 먼저 가세요” 했다. 고맙다. 오늘은 일찍 간다.

택시 탔다. 집까지 25분. 핸드폰 봤다. 슬랙 알림 37개. 안 봤다. 내일 봐도 된다.

예전 같았으면 택시 안에서도 일했다. 메일 확인, 경쟁사 앱 켜보고, 지표 체크. 지금은 안 한다. 약속이 있어서.

아내랑 약속. 집에선 회사 얘기 안 하기. 3년 전에 정한 규칙이다.

첫 번째 결혼, 2015년

전처랑 헤어진 이유. 한마디로 정리하면 “일 때문”이다.

아침에 일 얘기, 저녁에 일 얘기. 주말에도 일 얘기, 침대에서도 일 얘기. “오늘 투자자가”, “우리 앱이”, “경쟁사가”.

전처가 참았다. 2년. 그러다 폭발했다. 어느 날.

“당신이랑 사는 건지, 회사랑 사는 건지 모르겠어.”

그 말 듣고도 못 고쳤다. 나. “지금이 중요한 시기라서” 변명했다. 회사는 망했고, 결혼도 망했다.

2016년 이혼. 아들 양육권은 전처. 나는 빈손으로 나왔다.

그때 깨달았다. 일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데, 가족은 안 되더라.

두 번째 만남, 2020년

현재 아내를 만난 건 2020년. 친구 소개팅이었다.

첫 만남에서 솔직하게 말했다. “이혼 경력 있고요, 창업 두 번 실패했어요.”

아내가 웃었다. “저도 이혼했어요. 프리랜서라 수입 불안정하고요.”

서로 상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인지 편했다.

3개월 만나고 결혼 얘기 나왔다. 나는 조건을 제시했다.

“제가 또 창업할 건데요, 그래도 괜찮으세요?” “네, 근데 조건 있어요.” “뭔데요?” “집에선 회사 얘기 하지 마세요.”

그 말 듣고 놀랐다. 그리고 고마웠다.

이 사람은 안다. 내가 뭘 잃었는지. 뭘 또 잃을 수 있는지.

2021년 재혼했다. 신혼여행 가기 전에 약속 정했다.

“집 = 회사 없는 곳” “퇴근 후엔 폰 진동” “주말 하루는 완전히 쉬기”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완벽하진 않지만.

오늘 저녁, 8시

집 도착했다. 현관문 열었다. 김치찌개 냄새. “왔어?” “응.”

식탁에 앉았다. 밥 먹으면서 아내가 물었다.

“오늘 어땠어?” “응, 괜찮았어.”

더 묻지 않았다. 아내는. 나도 더 말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말했을 것들. 오늘 투자사 미팅 잘됐다고. 다음 달 매출 목표 달성할 것 같다고. 경쟁사가 시리즈B 받았다고.

참았다. 이게 우리의 약속이니까.

“당신은? 작업 어때?” “음, 마감이 다음 주라 좀 바빠.” “많이 힘들어?” “할 만해. 재밌는 프로젝트야.”

그렇게 밥 먹었다. 창업 얘기 없이. 투자 얘기 없이. 매출 얘기 없이.

그냥 우리 얘기만.

밤 10시, 거실

설거지 같이 했다. 드라마 틀었다. 넷플릭스.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아내가 내 어깨에 기댔다. “편해?” “응.”

드라마는 별로였다. 근데 상관없었다.

이 시간이 좋았다. 회사 생각 안 하는 시간. 흑자 전환 생각 안 하는 시간. 경쟁사 생각 안 하는 시간.

그냥 남편인 시간.

핸드폰 진동 왔다. 슬랙. 개발팀에서. 안 봤다.

아내가 물었다. “급한 거 아니야?” “아니, 내일 봐도 돼.”

거짓말은 아니다. 세상에 오늘 밤 당장 해결할 일은 없다. 내일 아침에 해도 된다.

이게 두 번째 실패 후 배운 거다. 급한 것처럼 보이는 건 다 내일 아침에 해도 된다는 것.

정말 급한 건 따로 있다. 지금 옆에 있는 사람. 이 사람 놓치는 게 진짜 급한 일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차이

전처한테 미안하다. 그때 내가 어렸다.

30대 초반, 첫 창업. 모든 게 급했다.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 빨리 커야 한다는 조급함.

집에 와서도 노트북 켰다. 주말에도 투자 자료 만들었다. 아내가 말 걸면 “잠깐만” 했다.

그게 쌓였다. 작은 “잠깐만”들이.

결국 아내가 떠났다. “당신 일이 더 중요하잖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때 내겐 회사가 더 중요했으니까.

지금은 다르다. 회사도 중요하다. 당연히. 근데 순서가 바뀌었다.

1순위: 나 2순위: 가족 3순위: 회사

예전엔 반대였다. 회사, 회사, 회사. 나도 가족도 회사 다음이었다.

그렇게 살다가 둘 다 잃었다. 회사도, 가족도.

이번엔 안 그러려고 한다. 회사 망하면 또 시작하면 된다. 근데 가족은 다시 못 만든다.

약속을 지키는 법

쉽지 않다. 솔직히. 퇴근하고 집 오면 말하고 싶다. 오늘 있었던 일들.

특히 잘된 날. “오늘 계약 하나 따냈어!” 말하고 싶다.

안 좋은 날도. “오늘 투자 미팅 망했어.” 털어놓고 싶다.

참는다. 일단. 대신 다른 데 말한다.

창업가 모임에서. 후배 창업가들이랑 술 마실 때. 멘토링할 때.

거기서 실컷 얘기한다. 회사 얘기, 투자 얘기, 매출 얘기.

그러고 집 오면 괜찮다. 이미 다 말했으니까.

아내한테 말하고 싶은 욕구. 다른 데서 해소되니까.

그리고 깨달았다. 아내가 듣고 싶어 하는 건 회사 얘기가 아니라는 것.

“오늘 점심 뭐 먹었어?” “출근길에 날씨 어땠어?” “요즘 뭐 재밌는 거 없어?”

이런 거다. 일상. 소소한 것들.

예전엔 이게 시간 낭비 같았다. 지금은 안다. 이게 진짜 중요한 대화라는 걸.

아들 생각

한 달에 한 번 만난다. 전처 아들. 이제 중학생.

만나면 물어본다. “요즘 어때?” “학교는?” “친구들은?”

아들이 대답한다. 짧게. 성의 없이. “괜찮아요.” “그냥 그래요.”

어색하다. 여전히.

예전에 같이 살 때도 어색했다. 나는 맨날 회사 일로 바빴으니까. 주말에도 노트북 켜놓고 일했으니까.

아들이 말 걸면 “아빠 바빠” 했다. 그게 쌓였다.

지금도 그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 몇 시간으론 부족하다.

이게 제일 후회된다. 회사보다 아들과 시간 보낼 걸.

돈은 나중에 벌 수 있는데, 아들 어린 시절은 다시 안 온다.

그걸 몰랐다. 그땐.

현재 아내랑 아이 안 갖기로 했다. 서로 동의했다.

이유는 말 안 했지만 아내가 안다. 내가 아빠 역할 제대로 못 할 거라는 걸.

회사 하면서 육아는 못 한다. 또 같은 실수 하고 싶지 않다.

아내가 이해해줘서 고맙다.

밤 11시 30분, 침실

이제 잘 시간. 내일 아침 6시 기상.

침대 누웠다. 아내가 옆에 누웠다. “잘 자.” “응, 잘 자.”

불 껐다.

어둠 속에서 생각했다. 오늘 하루.

회사는 잘 돌아간다. 팀은 열심히 한다. 투자사는 만족한다. 매출은 오른다.

근데 제일 중요한 건. 옆에서 자는 이 사람. 아직 옆에 있다는 것.

첫 번째 때 잃어버린 것. 이번엔 안 잃어버리고 있다.

그게 제일 큰 성공이다. 회사 엑싯보다 더 큰.

창업가의 두 번째 기회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재기의 비결이 뭐예요?”

대답한다. “일단 살아남는 거요.”

회사 말고. 사람으로.

망해도 살아있어야 재기한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관계적으로.

첫 번째 실패 후 나는 다 무너졌다. 결혼, 건강, 재정, 자존감.

다시 일어서는 데 2년 걸렸다.

두 번째 실패는 달랐다. 회사는 망했지만 나는 안 망했다. 관계는 남아있었고, 건강은 괜찮았고, 다시 시작할 여력이 있었다.

차이가 뭐였을까. 생각해보면 하나다.

일을 집에 안 가져간 것. 실패해도 집은 안전지대로 남긴 것.

그래서 회사 망해도 괜찮았다. 집에 오면 쉴 수 있었으니까.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첫 번째 때는 달랐다. 집도 전쟁터였다. 쉴 곳이 없었다. 그래서 완전히 무너졌다.

이번엔 다르다. 회사는 전쟁터지만, 집은 피난처다.

그래서 버틸 수 있다. 매일매일.

규칙의 의미

“집에선 회사 얘기 안 하기”

이 규칙. 처음엔 답답했다.

말하고 싶은 거 참는 게. 공유하고 싶은 거 안 하는 게.

근데 지금은 안다. 이게 서로를 지키는 방법이라는 걸.

나를 지킨다. 일중독에서. 강박에서. 불안에서.

아내를 지킨다. 내 스트레스로부터. 내 실패 공포로부터. 내 조급함으로부터.

그리고 우리를 지킨다. 첫 번째 결혼의 전철로부터.

규칙은 제약이 아니다. 보호막이다.

이 선을 넘지 않으면, 우린 괜찮다.

회사가 잘돼도, 회사가 안 돼도, 우린 괜찮다.

마지막 창업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세 번째 창업.

성공하면 좋고, 실패해도 괜찮다.

이미 얻은 게 있으니까. 일과 삶의 균형. 아내와의 관계. 나 자신을 지키는 법.

이걸 배우는 데 두 번의 실패가 필요했다. 비싼 수업료였다.

근데 후회는 안 한다. 이제라도 배웠으니까.

42살. 늦지 않았다.

다시 시작할 수도 있고, 그만둘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옆에 사람은 있을 거다.

그게 제일 중요하다.


저녁 8시, 회사 얘기 안 하고 밥 먹었다. 이게 성공이다.